고해상도 현미경으로 찍은 세포를 들여다보면 세포는 하나의 도시국가입니다. 3만개의 단백질 교환센터가 에너지와 물질을 풀어 고도질서의 세포 도시를 운영합니다. 중앙에 세포핵이 성전처럼 있고 핵산에는 생명체의 시원인 DNA가 이스라엘의 성궤처럼 모셔져 있군요. 질소염기 AGCT의 알파벳으로 쓰여진 유전암호는 태초부터 지금까지의 생명의 역사를 기록했습니다. 인간의 염색체 23쌍은 500쪽 4000권의 장서로 채워진 도서관과 같다고 합니다. 인간의 몸은 100조의 세포도시가 모여 복잡계의 질서를 이룬 은하성단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지구생태계는 약 3천만종으로 분류된 생명연합의 다중우주이군요.
그러나 이 모두는 세포라는 문법으로 쓴 생명의 책들. 플라타너스의 잎맥과 당신의 정맥은 수액과 혈액을 운반하는 상동(相同)기관입니다. 이중나선 모양의 DNA의 총길이는 약 2000억km. 야곱의 사다리처럼 지상에서 하늘까지 늘어선 ‘생명의 나무’입니다.
5억 년 전 캄브리아기에 생명의 폭발이 일어나 생명의 에덴동산이 지구에 펼쳐졌습니다. 1만 년 전 인간의 의식이 문자로 기록되면서 문명의 폭발이 일어났습니다. 21세기는 지식이 매 2년마다 배증하는 정보 폭발의 시대. 뇌 안의 가상세계가 현실의 시공간을 지나 풍선처럼 커지고 있습니다. 뇌세포도 DNA가 쓴 문법이므로 인간의 의식이란 ‘생명장(生命場)’ 스스로의 생각일까요. 식물들의 ‘오라'와 ’페로몬'도 식물들의 의식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 모든 질문의 답을 품고 있는 생명은 번식의 춤을 추느라 몸이 달아올랐습니다. 해바라기는 태양아래 꽃을 피우고 공작새는 채색 무늬의 꼬리 깃을 부채처럼 펼쳤습니다. 당신은 연인의 검은 눈동자를 보며 사랑에 빠져있습니다.
서효인-백년 동안의 세계대전
평화는 전투적으로 지속되었다. 노르망디에서 시베리아를 지나 인천에 닿기까지, 당신은 얌전한 사람이었다. 검독수리가 보이면 아무 참호에 기어들어가 둥글게 몸을 말았다. 포탄이 떨어지는 반동에 당신은 순한 사람이었다. 늘 10분 정도는 늦게 도착했고, 의무병은 가장 멀리 있었다. 지혈하는 법을 스스로 깨우치며 적혈구의 생김처럼 당신은 현명한 사람이었다. 전투는 강물처럼 이어진다. 통신병은 터지지 않는 전화를 들고 울상이고, 기다리는 팩스는 오지 않는다. 교각을 폭파하며, 다리를 지나던 사람을 헤아리는 당신은 정확한 사람이다. 굉음에 움츠러드는 사지를 애써 달래며 수통에 논물을 채우는 당신은 배운 사람이다. 금연건물에서 모르핀을 허벅지에 찌르는 당신은 인내심 강한 사람이다. 허벅지 안쪽을 훔쳐보며 군가를 부르는 당신은 멋진 사람이다. 노래책을 뒤지며 모든 일을 망각하는 당신은 유머러스한 사람이다. 불침번처럼 불면증에 시달리는 당신은 사람이다. 명령을 기다리며 전쟁의 뒤를 두려워하는 당신은 사람이었다. 백 년이 지자 당신의 평화는 인간적으로, 계속될 것이다. 당신이, 사람이라면.
임지은-낱말 케이크
나는 지구에 잘못 배달되었다
팔과 다리가 조금씩 어긋난 감정을 입고
요즘 사람 행세를 했다
어울려 웃고 떠든 밤에는
집에 돌아와
불 꺼진 방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아직 뜯어보지 않은 선물처럼
낱말 맞히기를 풀었다
세로줄을 다 풀지 못했는데
창밖으로 가로줄이 배달되었다
그러나 나에겐 아직 풀지 않은 아침이 더 많았다
그 어색함이 아득해
냉장고 속 케이크를 푹푹 떠먹었다
얼굴 속에서 한참을 앉아 있었는데
배 속에서 잃어버린
퍼즐 조각이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귀를 넣어 귓속에 넣었다
비로소 사람처럼
문밖으로 걸어 나갈 수 있었다
이운진-슬픈 환생
몽골에서는 기르던 개가 죽으면 꼬리를 자르고 묻어 준단다
다음 생에는 사람으로 태어나라고,
사람으로 태어난 나는 궁금하다
내 꼬리를 잘라 준 주인은 어떤 기도와 함께 나를 묻었을까
가만히 꼬리뼈를 만져 본다
나는 꼬리를 잃고 사람의 무엇을 었었나
거짓말할 때의 표정 같은 거
개보다 훨씬 길게 슬픔과 싸워야 할 시간 같은 거
개였을 때 나는 이것을 원했을까
사람이 된 나는 궁금하다
지평선 아래로 지는 붉은 태양과
그 자리에 떠오르는 은하수
양 떼를 몰고 초원을 달리던 바람의 속도를 잊고
또 고비사막의 밤을 잊고
그 밤보다 더 외로운 인생을 정말 바랐을까
꼬리가 있던 흔적을 더듬으며
모래언덕에 뒹굴고 있을 나의 꼬리를 생각한다
꼬리를 자른 주인의 슬픈 축복으로
나는 적어도 허무를 얻었으나
내 개의 꼬리는 어떡할까 생각한다
황경신-생각이 나서 117번째 글
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
누군가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 보면
누군가를 얼마나 많이 생각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있다와 없다는 공생한다.
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가
행위는 약속할 수 있다. 그러나 감각은 약속할 수 없다. 왜냐하면 감각은 의지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원히 사랑한다는 약속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랑은 감각만이 아니다. 사랑의 본질은 사랑한다는 행위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